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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장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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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의 철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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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화일1 : |
|  2011.7.16 1523 철암, 30x160cm, compressed color charcoal on paper-w.jpg (2380564 By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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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의 철암에
2011.7.16 토, 오후 5시 40여 명의 사람들이 골뱅이 갤러리에 모였다. 음식을 차려 놓고 빙 둘러 섰다. 누군가에 의해 일련의 차례가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철암그리기를 회상했다. 어언 10여 년이 지났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가파른 골목길에 사라짐의 스산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그래서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탄광촌 철암과 마주쳤던 그때가 엊그제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잔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철암을 꿈꾸었다. 이번 정기 철암그리기가 108회째다. 그 동안 작가들이 그린 철암과 실제 철암이 서로를 비추며 마주해왔다. 머릿속과 바깥은 두 개의 같은 현실이다. 동전의 양면이 그렇듯이 머릿속에 그리는 철암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두 철암이 공존하며 서로를 맴돌아 지금에 이르렀다. 기쁨의 마주침이건 슬픔의 마주침이건 만남 자체가 소중하다. 어쩌다 두 개가 하나의 현실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긴 회상 끝에 내게 말을 넘겼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의 눈초리에 내가 말해야 할 내용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늘 그렇듯이 모종의 저항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도 남이 잘 알아차릴 수 없는 중얼거림의 말투로. 중얼거림이 시작되었다.
2011.7.15 금 낮과 밤이 교차되는 푸르스름한 초저녁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ㄱㅎ 선생이다. 당연히 철암역갤러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인다며 성화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한ㅇㅈ 선생이다. 어떻게 할 거냐는 말인 즉은 다그침이다. 대천에서 그새 올라온 한선생과 밤 12시 수서에서 철암으로 출발했다. 비가 내렸다. 깜깜한 도로가 번들거리는 비늘처럼 숨을 쉬었다. "저 차를 계속 뒤따라 갈건가요?" 한 선생이 툭, 뱉었다. 육중한 덤프트럭이 일으키는 물보라가 대단했다. "싫어하지 않을까." 멋쩍은 표정으로 추월을 시도했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고 있지 않았다. 둘은 내내 철암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추운 겨울날 철암역 갤러리 개관 전을 앞두고 나는 철암의 곳곳에 웅크려 그림을 그렸고 한 선생은 묵묵한 뚝심으로 철암역 한편을 갤러리로 개조했다. 지금 윈도우 갤러리로 남아있지만 그땐 20평 남짓의 번듯한 갤러리였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작품이 철암역갤러리에 전시되었다. 그 갤러리에 전시하러 내려간다. 현장에서 그림을 그려 바로 걸 생각이다. 오랜만에 사생의 날것을 느껴보고 싶다.
2011.7.16 토 새벽 5시쯤 철암에 도착했다. 두 달 전에 다시 오픈했다는 황실장에 몸을 눕혔다. 10년 전 겨울에 묵었던 그 여관이었다. 왈칵 반가웠다. 나무로 만든 여닫이 창문은 그대로였다. 흠흠, 차가운 새벽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여전히 맑다. 잠시 눈을 붙였다 떴는데, 정오다. 슬렁슬렁 철암로를 걸었다. 이 선생과 몇몇 작가를 만났다. 그들은 바닥만 남고 철거된 천변상가에 뭔가를 설치했다. 바닥은 재질과 문양, 높낮이도 제각각 달랐다. 생활의 흔적 속에 느껴지는 진지한 자유로움이다. 장마 끝에 갠 하늘이 찬란했다. 철암역 윈도우 갤러리 앞에 섰다. 한 면이 비었다. 앞산의 푸름이 창문에 비쳤다. 그대로 그림이다. 오늘 오후 5시에 전시를 개막하는데 지금 그림을 그려서 될까. 약한 마음이 한구석에 일었지만 그 일필이 보고 싶다는 옆 사람의 말에, 바로 작심했다.
2011.7.16 15:23 철암, 30x160cm, compressed color charcoal on paper
휑하니 공원이 되어버린 신설동 한복판에 30x40cm 스케치북을 땅바닥에 폈다. 눈앞에 저탄장과 선탄장이 철암로를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훕, 숨을 크게 들이쉬고 녹색 압축목탄을 집어 들었다. 산의 눈부신 녹색 피부를 문질렀다. 새파란 녹색이 참 깨끗했다. 이번엔 짙은 청색의 압축목탄이 주름진 계곡을 따라 지나갔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철암상가가 보였고 철암역사가 우뚝 보였다. 저탄장의 녹색 비닐이 바랬다. 그러고 보니 단이 많이 줄었다. 경석장의 거무튀튀한 돌 더미가 저탄장의 오른쪽 산등성을 덮었다. 아래로 선탄장의 건축물이 이어졌다. 파란 색의 거대한 원뿔지붕이 보였다. 좁은 통로가 선탄장의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었다. 삼방교 위쪽에 아직 헐리지 않은 천변상가가 늘어섰다. 이제 갤러리로 거듭나게 된 골뱅이 피시방과 제일다방 건물의 뒤편도 보였다. 이쯤에서 허리를 펴고 검정색 압축목탄을 꺼내 들었다. 지나온 길을 거꾸로 따라가며 하늘에 구름과 산등성과 선탄장과 천변의 건물 따위를 서로 구분 지었다. 멈칫, 문지르거나 휙, 베거나. 굵은 검정의 선이 개체들의 윤곽을 갈라냈다. 엄지만한 압축목탄은 젖은 종이 위에 제 몸을 아낌없이 녹여냈다. 7월의 철암이 그렇게 종이에 내려앉았고, 이어 철암역 갤러리 벽에 붙어 그림이 되었다. <2011.7.16 오후 3시 철암>
2011.7.16 저녁 7시 사람들은 구와우로 이동했다. 구불거리는 장발에 검게 그을린 주인장의 낯익은 얼굴이 반겼다. 그의 실루엣은 이제 구와우와 잘 어울렸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해바라기가 아직은 파랗다. 곧 해바라기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작년엔 6만여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라ㅇ 선생의 철조각이 야외에 전시되었다. 가느다란 철골을 용접하여 만든 사람조각이다. 양팔 벌린 조각손끝에 잠자리가 내려앉았다. 그와 같이 했던 짧은 산행이 기억났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한동안 구와우에 머물렀다. 사람은 가고, 작품이 왔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산 개울물이 굽이쳐 흐르는 몽골 텐트 아래 음식이 차려졌다. 삼삼오오 야외식탁에 모여들었다. 그 옛날 다방 디제이였다는 쥔장의 오래된 앰프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푸른 야채와 붉은 김치찌개 사이로 막걸리 잔이 분주하다. 밤은 서서히 익어갔다.
우리 식탁에 '중얼거림'이 화제로 올랐다. 중얼거림은 작가의 전형적인 말투다. 질문이, 질문하는 자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대답이, 대답하는 자를 원천적으로 구속한다. 진정으로 창조적인 작가에게 질문과 대답은 물음과 응답으로 대체된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다. 곧 중얼거림이다. 작가의 중얼거림은 모든 것을 유보한다. 확정된 건 없다. 중얼거림과 웅얼거림은.. 술이 몇 순배 돌자 사람들은 이 테이블에서 저 테이블로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쯤 떠날 채비를 했다. 시원찮은 몸과 내일 있을 성미산사람들 그리기 일정 때문이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멀리 불 밝은 나무 아래 흔들거리는 소란스러움이 더없이 정겨웠다.
2011.7.16 밤 10시 제천까지 자동차 전용도로를 시원스레 달렸다. 어피차 밤이라 아무 것도 안보였다. 얼마쯤 달렸을까. 카세트테이프의 노래가 반복되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의 애절한 노랫말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천지를 뒤덮었다. 껐다 켰다 장난이라도 치듯이 번쩍거리며 하늘이 요동을 쳤다. 이윽고 장대비를 쏟아냈다. 비에 갇혀 중앙고속도로를 달렸다. 한치 앞을 간신히 내다볼 수 있었다. 적막감이 감돌았다. 띠링, 구와우에서 문자가 날아왔다. '연락바람' '하염없이 직진 중' 나는 전혀 다른 세계로 건너와 있다. 뻥 뚫린 하늘아래 한 점으로 달리고 있다. 고요가 지속될수록 졸리다. 생각에 매달려 보자.
왜 철암에 오나. 낯선 철암에서 익숙한 '나'를 마주친다. 철암이 내게 진리적 영감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근대화의 치열한 삶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지만 생각을 해보면 그렇다. 철암은 '오래된 미래'처럼 다가왔다. 두고 온 나를 철암에서 본다. 그 한가지로 철암은 생업으로서 화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미술을 수단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미술가는 현실적인 생업과 별 상관없다. 미술가가 추구하는 진리적 가치가 제도를 설득하면 권력이 되고 돈이 되는 것이지, 미술가의 일상적인 생활은 별도의 영역이다. 그러나 화가는 화가로 살아갈 수 있는 생활터전이 필요하다. 화가가 사는 마을이 있어야 한다. 마을화가는 마을사람이 원하는 그림을 그린다. 마을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원할까. 그들이 좋아하는 그림은 좋은 그림이다. 흔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화가는 그것을 찾아 그림을 그린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좋은 그림을 가리키며 그래, 저거야 라고 외칠 뿐이다.
그런가하면 새로운 그림이 있다. 구태의연한 낡은 가치를 버리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에 걸맞은 그림을 새롭게 그려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한다. 새로운 그림은 기존의 그림을 낡은 것으로 간주함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그림은 기존을 대체하기 위해 누군가를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은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 그러나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라면, 그리하여 기존과의 소통을 포기한다면, 단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상품논리를 좇게 될 것이다. 좋은 그림이 새롭지 않을 수 있지만 새로운 그림이라고 다 좋은 그림은 아니다. 새로운 그림을 추구하기에 앞서 좋은 그림을 생산하는 화가의 모습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아닐까. 아니, 좋은 그림이 새로운 그림으로 제시되어야하는 시점에 이른 건 아닐까.
서울에 들어서자 비가 줄었다. 일산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몸을 씻자마자 벌러덩 누웠다. 어제 밤에서 오늘 밤까지 있었던 일들이 까마득했다. 2011.7 륮.
[출처] 칠월의 철암에 rhkdvk작성자 류장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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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하기] 2011-07-25 00:2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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